망가를 한국어로 옮길 때 기술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건 OCR이나 식자가 아닙니다. 그건 결국 풀리는 문제입니다.
정답이 없는 쪽은 따로 있습니다. 말투와 호칭입니다.
만화 번역기를 만들면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검출이나 복원은 정답을 정의할 수 있는데, 이쪽은 애초에 정답이 없습니다.
왜 하필 한국어에서 문제가 되는가
영어로 옮길 때는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 크지 않습니다. 영어에는 대응하는 체계가 아예 없어서, 번역가가 어휘와 문장 길이로 뭉뚱그려 처리하고 독자도 그러려니 합니다. -san을 살리든 빼든 영어 문장 자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국어는 다릅니다. 한국어에도 높임 체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뭉갤 수가 없습니다. 문장을 쓰는 순간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하나를 골라야 하고, 그 선택이 두 캐릭터의 관계를 독자에게 선언해버립니다.
즉 한국어 번역에서는 이게 선택지가 아니라 강제 사항입니다.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비슷해 보이지만 경계가 다릅니다
일본어의 です·ます체를 존댓말, 반말체를 반말로 1:1 대응시키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어긋나는 구간이 꽤 있습니다.
일본어 쪽이 더 촘촘한 경우 일본어 경어는 존경어·겸양어·정중어가 갈립니다. 상대를 높이는 것과 나를 낮추는 것이 문법적으로 다른 형태입니다. 비즈니스 장면이나 시대물에서 이 층위가 무너지면 캐릭터의 계급 자체가 흐려집니다.
한국어 쪽이 더 촘촘한 경우 한국어는 해요체·합쇼체·해체·해라체가 각각 다른 인상을 줍니다. 일본어의 です체 하나가 한국어에서는 "~해요"도 되고 "~합니다"도 되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캐릭터를 만듭니다. 고등학생이 "~합니다"를 쓰면 딱딱한 애가 되고, 회사원이 상사에게 "~해요"를 쓰면 무례하거나 친밀한 관계가 됩니다.
원문에 없는 정보를 번역가가 매번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이 서열의 무게가 다릅니다 한국어에서 존댓말/반말은 나이와 강하게 묶여 있습니다. 일본어는 그보다 상하관계와 거리감(우치·소토) 쪽에 더 기울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갑인데 존댓말을 쓰는" 관계나 "연하인데 반말을 듣는" 관계가 원문에서는 자연스러운데 한국어로 옮기면 어색해지는 일이 생깁니다.
호칭 처리, 세 가지 방식
-상, -쿤, -짱, 선배를 어떻게 할 것인가. 크게 세 갈래입니다.
1. 그대로 두기 (스즈키상, 타나카쿤) 원작의 뉘앙스가 가장 잘 보존됩니다. 망가를 꾸준히 보는 독자층은 이미 이 접미사들의 의미를 알고 있어서 정보 손실이 거의 없습니다. 팬 번역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쓰는 방식이고, 정발본도 요즘은 이쪽을 택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단점은 일본 작품을 처음 보는 독자에게는 진입 장벽이 된다는 점입니다.
2. 한국식으로 바꾸기 (스즈키 씨, 형, 선배, 오빠) 읽기가 훨씬 편합니다. 대신 정보가 깎입니다. -쿤과 -짱의 차이, 선배를 부를 때의 거리감 같은 게 사라지거나 뭉개집니다.
특히 오빠는 조심해야 합니다. 한국어에서 이 단어가 갖는 관계의 함의가 일본어 お兄ちゃん보다 훨씬 넓고 무겁습니다. 여동생이 쓰는 경우와 연인이 쓰는 경우가 같은 단어가 되어버립니다.
3. 생략하기 한국어는 호칭 없이도 문장이 자연스럽게 굴러갑니다. 말풍선 공간이 부족할 때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합니다. 다만 망가에서 호칭은 종종 그 자체로 연출입니다. 계속 -상으로 부르던 캐릭터가 갑자기 이름만 부르는 순간이 고백 장면인 경우가 있습니다. 생략하면 그 장면이 통째로 사라집니다.
어느 쪽이든, 작품 안에서 일관되기만 하면 됩니다. 독자 불만의 대부분은 선택 자체가 아니라 중간에 바뀌는 것에서 나옵니다.
기계 번역이 여기서 무너지는 이유
일반 번역기로 망가를 돌리면 말투가 문장마다 널뛰는 걸 보셨을 겁니다. 이유가 구조적입니다.
일본어는 주어를 생략합니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는지가 문장에 안 적혀 있습니다. 그 정보는 어미와 그림에 들어 있습니다. 문장만 보는 번역기는 관계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번역기는 문장 단위로 처리합니다. 3페이지 전에 이 캐릭터가 반말을 썼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매 문장이 독립된 판단이니 일관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캐릭터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한 페이지에 세 명이 말하고 있어도, 번역기에게는 그냥 텍스트 뭉치입니다.
구글 번역으로 만화를 돌리면 실제로 어떻게 나오는지를 페이지 단위로 비교해본 적이 있는데, 오역보다 말투 흔들림이 훨씬 거슬린다는 게 공통된 반응이었습니다. 뜻은 대충 통하는데 캐릭터가 계속 바뀌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직접 정리하면서 읽는다면
원서를 꾸준히 보실 생각이라면, 캐릭터 시트를 하나 만들어두는 게 어떤 번역 요령보다 효과가 큽니다.
적을 항목은 네 개면 충분합니다.
이름
다른 캐릭터를 부르는 호칭 (A→B, A→C 각각)
말투 등급 (해요체 / 합쇼체 / 해체)
예시 대사 두세 개
특히 누가 누구에게 어떤 말투를 쓰는지는 쌍방향으로 적어두셔야 합니다. A가 B에게 존댓말을 쓴다고 해서 B도 A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아니고, 이 비대칭이 관계를 보여주는 핵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읽는 경우라면 이 작업 자체가 좋은 연습이 됩니다. 어미만 보고 관계를 읽어내는 훈련이라서요.
도구를 쓸 때 확인할 점
말투 처리가 되는지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한 페이지가 아니라 한 화 전체를 돌려보는 것입니다.
한 페이지만 보면 어느 도구나 그럴듯합니다. 차이는 분량에서 드러납니다. 10페이지쯤 지났을 때 같은 캐릭터가 같은 말투를 유지하고 있는지, 호칭이 중간에 바뀌지 않았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만화 번역기는 페이지 단위가 아니라 화 단위로 문맥을 유지합니다. 캐릭터별 말투 등급과 호칭을 챕터 내내 같은 값으로 끌고 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다만 원작에서 관계가 바뀌는 장면 — 존댓말을 쓰던 캐릭터가 반말로 내려오는 순간 같은 것 — 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은 그 변화를 오류로 판단하고 앞의 말투로 되돌리기 쉽습니다. 일관성과 변화를 구분하는 일은 아직 사람이 더 잘합니다.
관련해서 일본 만화가 유독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와 원서(RAW) 만화를 번역해서 읽는 방법도 함께 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