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만화로 공부하면 재밌게 늘겠지."
이 생각으로 시작해서 1권 3페이지에서 멈춘 경험, 꽤 흔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만화가 교재로 좋은 건 사실인데, 아무 작품이나 집어들면 거의 실패합니다. 되는 조건과 안 되는 조건이 꽤 명확해서 정리해봤습니다.
저는 만화 번역기를 만들고 있어서 원서를 읽는 분들을 자주 보는데, 공부가 목적인 경우와 그냥 내용이 궁금한 경우는 필요한 게 완전히 다릅니다. 이 글은 앞쪽, 공부가 목적인 경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만화가 교재로 좋은 이유
대사가 짧습니다. 말풍선에 들어가야 하니 한 문장이 길어질 수가 없습니다. 소설처럼 세 줄짜리 문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림이 문맥을 보완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표정과 상황에서 절반쯤 유추됩니다. 이게 생각보다 큽니다. 텍스트만 있는 교재에서는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그냥 막히지만, 만화는 대충 넘어가면서도 읽는 게 가능합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한 작품 안에서 캐릭터의 말버릇, 장르 특유의 어휘가 계속 나옵니다. 자연스럽게 반복 학습이 됩니다.
만화가 교재로 나쁜 이유
정직하게 말하면 단점도 뚜렷합니다.
대부분 구어체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です·ます체가 거의 안 나옵니다. 만화를 아무리 읽어도 비즈니스 일본어는 늘지 않습니다. JLPT 독해와도 결이 다릅니다.
사전에 없는 말이 많습니다. 캐릭터가 만들어낸 말버릇, 유행어, 작품 내 고유명사. 효과음은 아예 별개 세계입니다.
방언과 역할어가 섞입니다. 관서 사투리를 쓰는 캐릭터, 노인 말투(~じゃ), 무사 말투, 여성어. 이것들은 실제 일본인이 일상에서 쓰는 말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만화로만 배우면 캐릭터처럼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화는 주교재가 아니라 부교재입니다. 기본 문법을 따로 잡고, 만화로 어휘와 감각을 붙이는 조합이 현실적입니다.
작품 고르기: 후리가나가 기준입니다
초반에 가장 중요한 건 장르도 난이도도 아니고 후리가나 유무입니다.
후리가나는 한자 위에 작게 다는 히라가나 발음 표기입니다. 이게 있으면 한자를 몰라도 일단 읽을 수는 있습니다. 읽을 수 있으면 사전에서 찾을 수 있고, 찾을 수 있으면 학습이 굴러갑니다.
없으면 한자 하나 막힐 때마다 필기 인식으로 그려서 찾아야 합니다. 한 페이지에 다섯 번만 이래도 대부분 포기합니다.
후리가나가 대체로 있는 쪽 소년지·소녀지 계열. 어린 독자를 상정하고 만들기 때문에 한자 대부분에 후리가나가 붙습니다.
없는 경우가 많은 쪽 청년지 계열. 성인 독자 대상이라 후리가나를 생략하거나 어려운 한자에만 답니다.
좋아하는 작품이 청년지라도, 처음 한두 권은 후리가나가 있는 작품으로 감을 잡고 넘어가시는 게 결과적으로 빠릅니다.
난이도가 낮은 편인 소재 — 학원물, 일상물, 스포츠물. 나오는 어휘가 현실 생활과 겹칩니다.
난이도가 높은 편인 소재 — 시대물(고어체), 배틀물(기술명·조어), 법정물이나 의료물(전문 용어), SF·판타지(창작 용어).
읽는 방법 두 가지
정독 — 모르는 단어를 전부 찾으면서 읽습니다. 어휘는 확실히 붙지만 느립니다. 한 권에 몇 주씩 걸리고, 대부분 지쳐서 그만둡니다.
다독 — 모르는 게 나와도 넘어가면서 계속 읽습니다. 빠르고 안 지치지만, 새 단어가 잘 안 남습니다.
실제로 잘 되는 건 섞는 쪽입니다. 기본은 다독으로 가되, 한 페이지에 두세 개만 골라서 찾습니다. 고르는 기준은 "이 단어를 모르면 장면이 이해가 안 되는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갑니다.
전부 찾겠다는 마음이 가장 흔한 실패 원인입니다.
도구는 목적에 따라 갈립니다
여기서 갈래가 나뉘는데, 섞어 쓰면 둘 다 안 됩니다.
공부가 목적이라면 — 사전 도구 페이지 위에서 단어를 선택하면 뜻을 띄워주는 방식이 편합니다. 직접 찾는 것보다 빠르면서, 뜻이 눈에 들어오는 과정은 남습니다.
중요한 건 번역문을 먼저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어 문장을 먼저 보면 뇌가 일본어를 처리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원문을 읽고, 막힌 부분만 확인하는 순서를 지켜야 합니다.
내용이 궁금한 게 목적이라면 — 번역 도구 공부가 목적이 아닌데 사전 찾느라 한 권에 열 시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럴 땐 번역해서 읽는 쪽이 맞습니다.
둘 다 하려고 하면 대개 둘 다 실패합니다. 작품별로 목적을 정해두시는 걸 권합니다. 스토리가 급한 작품은 번역해서 보고, 공부용 작품은 따로 한 권 정해두는 식으로요.
현실적인 조합
지금까지를 정리하면 이 정도입니다.
문법은 별도 교재로 잡습니다. 만화는 부교재입니다.
첫 작품은 후리가나 있는 학원물·일상물로 고릅니다.
다독 기준으로 읽되 페이지당 두세 단어만 찾습니다.
공부용 작품과 재미용 작품을 분리합니다.
한 권을 끝내는 걸 목표로 삼습니다. 1권 완독이 10권 3페이지씩보다 훨씬 낫습니다.
일본어 실력과 무관하게 원서를 읽는 쪽에 관심이 있으시면, 정발되지 않은 작품을 원서로 따라잡는 방법과 일본 만화가 유독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도 함께 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